잊혀진 독립운동가, ‘미스터 션샤인’ 황기환을 아시나요?

입력 2020-12-30 23:32  


[한경잡앤조이=조수빈 기자 / 김하나 대학생 기자]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 유공자는 15000여명이다. 하지만 한국의 중등 교육 과정에서 배우는 인물들은 15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후손들에게 잊혀졌다. 그렇게 잊힌 독립운동가 중에는 황기환이라는 인물도 있다. 낯선 이름이겠지만 그 이름 앞에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조금은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그는 바로 2018년 7월부터 9월까지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이병헌이 연기한 유진 초이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다. 2019년 12월, 독립운동가 황기환 선생의 유해 봉환 작업이 착수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일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유해 봉환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와 더불어 독립운동가 황기환 선생의 일생을 돌아보고자 한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초이.(사진=tvN)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초이의 삶으로 재탄생한 독립운동가 황기환의 유년시절

조선시대 양반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난 유진은 모진 핍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유진은 신미양요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군 군함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후 갖은 고난 끝에 미군 장교가 돼 미국 공사관의 영사대리로서 조선에 돌아온다. 드라마 속 유진은 항일 운동을 위해 불꽃같은 생을 마감한다.

황기환 선생의 가계와 학업,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고 태어난 해는 1886년에서 1887년경으로 추정된다. 10대 후반인 1904년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황기환 선생은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 지원병으로 유럽전선에 나가 기독교 청년회 사업으로 중상자 구호를 담당했다. 미국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1917년 5월 18일 제정한 의무병역법에 따라 2390만 명의 징집대상자 중 280만 명을 징병하고, 그 외에도 자원자를 모집해 200만 명이 군대의 각 종 기구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투철한 애국심에 뛰어난 영어실력, 그리고 미군 복무라는 특이한 경력까지 갖추고 있던 황기환 선생은 이후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 1차 대전 승전국들을 누비며 활약했다. 1919년 6월 3일 파리에 도착한 황기환 선생은 한국 대표부 서기장으로 임용됐고 조선 독립을 위한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해외에서 ‘조선 독립’ 외쳤던 외로운 싸움

황기환 선생이 프랑스에서 이룬 대표적인 업적은 한인 노동자 구출이다.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영국까지 흘러들어온 한인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송환 될 뻔한 상황에서 영국 정부를 설득해 프랑스로 이주시켰다. 당시 영국 정부는 영일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송환 요구에 응하려고 했다. 소식을 들은 황기환 선생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정부에 항의를 했고 덕분에 한인 노동자 35명을 프랑스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프레더릭 아서 매켄지 (1869~1931,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등 친한파를 상대로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풍부한 재정과 인력을 가진 일본당국이 유럽의 신문들에 수록한 한국 관련 오보들에 대해 항의하고, 한국의 참상과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921년 6월 12일 황기환 선생은 영국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The Appeal of the Korean People for Liberation from Japan)’이라고 칭한 인쇄물을 배부하는 동시에 이것을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에게도 보냈다.

파리위원부와 런던사무소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황기환 선생은 워싱턴 회의를 준비하고 있던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워싱턴 회의 후 약 1년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외교 홍보 활동을 계속하다가 이후 1923년 심장마비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1995년 황기환 선생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했다.





△뉴욕 마운트 올리베 공동묘지의 황기환 선생 묘소.(사진=한국경제DB)

유족 없어 유해 찾기까지 유해 봉환까지 100년 걸려

황기환 선생의 유해는 미국 뉴욕 퀸즈 플러싱의 마운트 올리베 공동 묘지에 안장돼 있다. 묘소가 발견된 것은 불과 12년 전이다. 뉴욕 한인 교회 장철우 목사와 동포들에 의해 발견됐다. 

작은 비석에는 ‘대한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황기환 선생의 유해를 현충원으로 봉환해달라는 의뢰가 뒤따랐다. 이후 총영사관이 국가보훈처와 협의를 진행해 2019년 12월 유해 봉환 작업에 착수했다는 기사가 각종 언론사를 통해 보도됐다. 별세한지 96년 만에 한국 국립현충원으로의 봉환이 결정되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아직까지 봉환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정확히 일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황기환 선생의 유해 봉환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국가보훈처와의 통화에서 “2019년 12월에 유해 봉환 작업에 착수했다”며 “정식적인 봉환 절차는 미국 법원에서 판결이 나와야 진행이 가능하다. 현재는 판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황기환 선생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일생을 독립운동에 힘쓰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유족이 없다는 사실이 별세한지 100년 가까운 시간동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대한민국의 후손들로써 이제는 그 이름을 기억해야할 시간이다. 

subinn@hankyung.com

[사진=김하나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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